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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 방문/고궁

[경복궁 경회루]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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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관람하다보면 아무래도 눈에띄는곳은 경회루와 향원정을 들수있습니다. 경회루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실제로도 이곳은 왕과 신하들이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던곳입니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 태종12년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돌기둥만 남은 것을 고종때인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세울목적을 가지고 재건하였습니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입니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만 세우고 2층에는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습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중궁(中宮) 부분이 가장 높고, 그 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습니다.

 

경회루 설명

왕실의 큰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867년 재건되었다. 높은 2층 누마루에 올라 서쪽으로 인왕산, 동쪽으로 궁궐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주위의 넓은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7X5칸, 바닥면적933제곱미처로 282평 정도로 현존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2층마루는 세겹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심 3칸은 천지인을 그 바깥 12칸은 1년 12달을 가장 바깥의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등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으로 상징했다. 중건 당시에 경회루 연못에 2마리 청동용을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경회루 전경 지은이는 박자청으로 창덕궁등 당대 최고의 건축물을 만든 인물.

 

유모차타고 같이온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 가까이 흐른세월

 

 


 

경회루 관람 영상

 

 

 


 

 

 

경회루 안으로 들어가기위해 대기하는중 다리마다 여러가지 석물이 있는데 이곳은 청룡.. 자세히 관찰하는 중

 

 

경회루 서북방향 아래에있는 하향정은 조선시대에 없던 것으로 건립한 사람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으로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합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었지만 실제로 사용된건 역사에 비해 길지 않습니다. 태종이후로는 창덕궁을 오가며 사용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2백여년을 방치되다 고종이 등극하고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이후 권력의 집중을 위해 무리한 중건사업을 벌리면서 정비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일제시대에 많은 훼손이 있었고 현재 복원된것은 실제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2층 누각의 걸림쇠(? 정확한 명칭은 찾아봐야겠습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바닥은 이승만 박정희등 역대 정권시절에 이곳이 외교 연회장으로 쓰이면서 바닥에 카페트를 깔아서 사용해 좀벌레가 갉아먹어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크기를 짐작하기위해 발이 살짝 나옵니다..

박정희때는 역사 복원을 많이 하긴했지만 고증과정이 누락된것이 많고 성과위주의 속도전으로 인해 지금은 오히려 더많은 예산이 들어가게 생긴것들이 많습니다.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도 실제와 다르게 황제릉 형식의 향로와 어로를 만들었고(참도라 부르기도 했지만 조선왕릉에는 맞지않는 일본식 표기입니다) 현충사나 행주산성등등 여러곳에 갔을때도 미적인 감성을 훼손하는 콘크리트로 만든 누각들이며...

 

 

경회루 건물은 주역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앙의 3칸은 천지인 12칸은 1년 열두달을 20칸 바깥의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며 높낮이 경계에는 들어열개(위쪽으로 여는문) 창호가 달려있어 창호를 내리면 각각 닫한방이 됩니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재건당시 청동으로 만든 두마리용을 넣어 물과불을 다스리게 했다고하는데 1997년 준설공사 과정에서 출토 현재 국립고궁박물에 전시중입니다. 경회루는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북쪽방향의 북악산

 

서쪽방향 인왕산

 

 

1층 천정의 문양

 

 

1층의 기둥이고 원래 승천하는 용조각이 있었는데 외국사신들이 오면 연못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매우 신기롭게 바라봤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고종때에 복원하면서 그부분은 생략하고 지금처럼 만듬.

 

경회루에 얽인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경회루에 몰래들어갔다 출세한 구종직

세종대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종직은 숙직을 서던 어느밤에 높은품계가 아니면 들어가볼수 없던 경회루가 궁금해 몰래 들어갔다가 왕과 마주치게됩니다. 일생일대의 위기상황에서 세종은 노래를 시키고 춘추를 외우게했는데 한자도 틀리지않고 구술해 후일 정9품에서 정5품 벼슬을 하사

 

 

흥청망청

흥청망청은 마구잡이로 호기를 부리는 모습을 말하는데 흥청망청은 연산군이 팔도의 예쁜 여자들을 선발해 운평이란 기생으로 만들었고 이들중에서 궁궐까지 불러들인 이들은 흥청이라 불렀습니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흥청들과 유흥을 즐겼고 맑음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하는 망청이 되었습니다. 

흥청 출신으로는 연산군이후 등극한 중종의 후궁인 경빈이 있습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경빈은 문정왕후와 정난정에 밀려 결국 사사되는 운명이 되기도...

 

 

중종과 치마바위

중종은 반정이후 연산군과 관계된 단경왕후 신씨를 폐위시킵니다. 반정군들이 들어왔을때 자기를 죽이러 오는줄 알았던 중종은 부인이 말머리 방향이 어딘지 물어본후 죽이러온게 아니라는걸 알아냅니다. 하지만 폐위된이후 중종이 가끔 자신이 거처하던 인왕산 방향을 본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놓았다고합니다. 중종이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싶은 마음을 삭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복위될수 있는 상황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설화는 그냥 그럴듯한 이야기일수도...

 

단종과 경회루

수양대군 세조가 단종을 압박하자 이곳에서 양위하면서 옥새를 넘겨준 장소로 이때 박팽년이 분개해 연못에 뛰어들려하자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했다고합니다. 이들은 후일 결국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육신이되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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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관람은 인터넷 예매를 통해 가능합니다. 최소 일일전에 가능하며 주말에는 미리하지 않으면 매진되어있습니다. 현장에서는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매하기 - http://www.royalpalace.go.kr:8080/content/guide/guide26.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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