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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놀이터/근대

정동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길과 러시아 공사관 복원 - 덕수궁 선원전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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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이후 일본등 외세의 위협에 고종은 민비에 의해 쫓겨났던 엄상궁(후일 순헌황귀비)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녀의 기지로 경복궁을 탈출했고 친러파인 이범진등의 도움으로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당시 이곳 경운궁은 러시아 공사관과 지하에 연결된 곳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은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고 볼수있는 경희궁과 다리를 놓아 연결되어있었습니다. 즉 경운궁의 영역이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바로 밑에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관파천이후 독살을 우려해 통조림만 먹던 고종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에 이권만 계속 나눠주었고 이후 경운궁으로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자리를 찾고 싶어 했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수 없었던 상태... 이당시의 일이 아직도 과거형이 아닌것만 같은 느낌이 오는건 왜일런지...




1900년대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현재의 대한문(원래 이름은 대안문)은 정문이 아니었고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방향에 있었습니다.


중앙에 선글라스 착용한 고종 1900년대


덕수궁 대한문을 빠져나가는 고종의 국장행렬 - 1919년 3월 3일


정동 - 1892년


명성황후 시해이후 고종과 순종이 궁 밖으로 나가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순헌황귀비.. 당시 엄상궁은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미리 환심을 사두었고 아관파천 당시에도 고종과 순종이 타고나가는 가마를 자신의 편의를 보는것처럼 위장해 나감.. 이후 고종의 최측근이 되었고 황태자인 이은 영친왕까지 낳았지만 황후자리에는 오르지 못함..  많이 알려진것이지만 숙종대의 장희빈이후 후궁은 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것이 지켜진것..


순헌황귀비 1907년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올해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일명 ‘고종의 길’(왕의 길)을 복원한다. 

 

   ‘고종의 길’은 을미사변(1895) 이후 1896년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이동한 길로 추정된다.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공사관이 제작한 정동지도에는 선원전과 현 미국대사관 사이의 작은 길을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하고 있다.

 

  ‘고종의 길’ 복원은 2011년 정동부지 교환 시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동안 미국무부 재외공관관리국(Bureau of Overseas Buildings Operation)이 현지조사 등 총 4차례의 설계 검토과정을 거쳐 지난 6월 설계안을 최종 승인함에 따라 문화재청은 오는 9월 ‘고종의 길’ 복원사업을 착공하여 내년 말 완료할 계획이다.

 

  한편, ‘고종의 길’ 복원과 함께 정동부지에 선원전(璿源殿) 영역의 복원도 시행된다. 문화재청은 진전(眞殿)인 선원전,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과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을 복원할 계획이며, 주요전각을 비롯한 부속건물과 배후숲(상림원), 지형, 궁장 등도 복원해 나갈 예정이다.

 * 진전(眞殿): 역대 왕의 어진(御眞, 초상화)을 봉안한 건물

 * 빈전(殯殿): 왕이나 왕후 승하 후 그 시신을 모셔둔 곳 

 * 혼전(魂殿): 발인 후 부묘 전까지 신주(神主)를 모셔둔 곳

 

  덕수궁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타버리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로 옮겨 1901년에 복원되었다. 이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그 이듬해인 1920년부터 일제에 의해 해체, 철거 작업에 들어간 바 있다.

 

  해방 이후에는 해당 부지(수어청자리)는 경기여고 부지로 한동안 사용되다가 이후 주한미국대사관에 양도‧유지되어 왔는데,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를 만들기 위해 실시한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덕수궁 선원전 터가 확인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교환하기로 합의된 바 있고, 2011년에 한국으로 소유권이 다시 이전되었다.

 

  문화재청은 이후 흥덕전 권역의 발굴조사와 복원정비 연구용역을 진행하여 지난 2005년 수립했던 복원정비 기본계획의 사업우선 순위를 조정하여 지난해에「덕수궁 복원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덕수궁 복원 종합정비는 2039년까지 약 560억 원의 예산을 들여 3단계로 실시될 예정이다.


ㅇ주한미국대사관저와 덕수궁 선원전지간 경계 벽담장(L=113m, H=3.0m) 및 석축(L=50m, H=4.0m) 설치

ㅇ사업비/기간: 약25억원/2년(복원공사: 2016~2017년)


<경계벽 설치 계획 단면도>


<경계벽설치 계획 조감도-서쪽 부분>


그나저나 2039년 완공이면 내 나이가... 그래도 볼수있는 나이 그때되면 아들이나 손주가 데리고 가겠지라고 기대해봄...

<제1단계(2015∼2021년)>


<제2단계(2022∼2029년)>


<제3단계(2030∼2039년)>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올해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서울특별시 중구청(구청장 최창식)과 함께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서울 중구 정동길 소재)'을 내년부터 원형복원ㆍ정비해 2021년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 임금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함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의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 임금이 피신하여 국정을 수행하며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하였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곳이다. 1890년(고종 27)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되었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탑 부분만 남은 상태다.

 

  이곳에서 고종 임금은 친위 기병대를 설치하는 안건(1896.6.8.)과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1896.8.5.)을 반포하였으며,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명(1897.1.11.)하여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하는 등 일본을 비롯한 열강으로부터 주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환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향사(享祀, 제사)를 모두 옛 역서(曆書)의 예대로 거행하도록 조령(1896.7.24.)을 내리는 등 천자의 독립된 나라임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환궁(1897.2.20.)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구단(圜丘壇)을 건축하고 환구 의례를 거행한 후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1897.10.12.)하기에 이르렀다.

 * 환구단(圜丘壇)은 문화재 지정 시 문화재위원회에서 한글 표기는 고종 황제가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12일 자 ‘독립신문’ 기록에 따라 ‘환구단’으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圜丘壇’으로 하기로 함

 

  내년에 복원이 마무리되는 ‘고종의 길’이 마지막으로 닿았던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복원ㆍ정비 사업까지 완료되고 나면 현재 중ㆍ장기적으로 진행 중인 환구단 정비사업 등과 함께 당시 외세 열강에 맞서 자생적인 근대 국가를 추구했던 고종 임금의 삶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교육자료가 될 것이다.



<1896년 촬영된 서울 구러시아공사관 사진 (사진으로보는서울백년)>



<서울 구러시아공사관 전경 (민족의사진첩 외침과투쟁)>


<서울구러시아공사관평면도>


<1927년제작지적도로본서울 구러시아공사관배치도>



2015년 5월 정동 구러시아 공사관 방문 동영상



사진 및 이미지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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